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오 10세 (문단 편집) == 재위 기간 == || [[파일:external/www.salemcatholic.org/Pius-X-tiara.jpg|width=307]] || 전임자 [[레오 13세]] 때에 불었던 가톨릭교회의 자유주의 바람이 비오 10세 교황 때에 많이 사그라들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비오 10세의 치세는 반동의 시기로 평가받는다. 당시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신학자들은 집필금지 처분을 받았으며, 몇몇 책은 [[금서목록]]에 오르기도 하였다. 훗날 교황 [[요한 23세]]가 되는 안셀로 론칼리가 1905~1914년 사이에 고향 베르가모 교구장 자코모 라디니타데스키(Giacomo Radini-Tedeschi, 1857 ~ 1914) 주교 밑에서 비서 신부로 일하던 시절, 주교는 당시 가톨릭 기준으로 좌파적인 신념을 지니고 사회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비오 10세와 충돌했다. 비오 10세는 주교에게 벌려놓은 사업을 멈추라고 명령하였다. 주교는 비오 10세의 명령에 순명하였으나 내적으로 큰 아픔을 겪었고, 요한 23세는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요한 23세가 당시 천주교 내에서 '근대주의자'라는 부정적 뉘앙스의 평가를 받았던 것도 라디니타데스키 주교의 영향이 컸다.[* 훗날 [[요한 23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직전인 1958년에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발현 100주년 기념으로 건축된 성지 내 지하대성당의 봉헌을 주재했는데, 이 성당의 이름은 '성 비오 10세 대성당'이다. 두 사람의 악연을 생각하면, 꽤나 아이러니한 일.] 이런 행적, 성향으로 인해, 비오 10세는 약 반세기 후에 즉위하는 개방과 탈권위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진 [[요한 23세]]와는 대척점에 서는, 20세기 가톨릭 역사에서 전통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훗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반발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비오 10세의 이름을 따서 [[성 비오 10세회]]를 세울 때 단체 이름에 비오 10세의 이름을 올린 데에는 이러한 부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비오 10세는 [[가톨릭]] 신자에게 [[영성체]]를 자주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어린이 첫영성체 나이를 기존의 10~12세에서 7세까지 낮추어 영성체를 쉽게 해주는 결단을 내렸다. 이전에 많은 신자들은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 해도 보통 1달에 한두 번 정도 영성체할 뿐이었고, 많은 이가 대축일 때에만 영성체를 하였다. 또한 비오 10세는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나이인 7살이 지나고도 한참 후까지 첫영성체 시기를 미루는 것은 성체를 치유가 아니라 보상으로 여기는 그릇된 믿음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했다. 비오 10세 교황은 또 "존엄한 [[미사|성체성사]]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런 관행은 많은 악의 원인이 됐다"며 이런 관습이 "순진한 어린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게 만들었고 영적 양식을 박탈했다"고 밝혔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도 어렸을 적 비오 10세의 [[영성체]] 개혁의 혜택을 입어 만 6살인 1911년 말에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또한 1908년에는 [[성심수녀회]] 창설자 소피이 바라를, 1910년에는 [[프랑스]]의 [[잔 다르크]]를 [[복자|복녀]]로 시복했다. 1911년에는 [[천주교 대구대교구]]를 설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